쿵.
“왜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책상 치는 소리가 진료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미래는 주먹 쥔 손을 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흰 벽, 흰 책상, 흰 의자, 흰 바닥으로 뒤덮인 진료실에는 새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아주 메스껍고 역한 냄새였다.
미래는 당장이라도 점심으로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미래에게는 설명해야 할 것이 잔뜩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까?”
외계인이 온다. 외계인이 지구로 찾아온다. 미지에서 온 것들이 곧 지구를 뒤덮을 것이다. 그것이 스물다섯 살 천체물리학도 유미래의 주장이었다.
미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었다. 유미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물리학과 학부생 시절에 조별과제 조장을 도맡은 것도, 교수의 눈에 띄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던 것도, 그래서 대학원 연구실에 들어간 것도 전부 그로부터 기인했다.
소개를 받아 들어간 천체물리학 연구실에서는 모두가 실험대에 코를 박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미래는, 한술 더 뜨기로 했다. 남들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연구실로 나와서 한 시간 더 늦게 귀가했다. 그녀에게는 마침 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맡겨져 있었다. ‘운석’이었다.
하루에도 망원경을 수십 번 들여다보고, 수백 가지 논문을 훑어보며 앞으로 지구에 떨어지게 될 운석의 크기나 속도를 예측하는 데에 골몰했다. 대부분은 대기층에서 전소되기 때문에 그리 중대한 사안은 아니었지만, 미래가 도출하는 데이터는 언제나 정확했기에 그는 꽤나 유망한 인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타지의 분석 연구소에 취직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망원경을 통해 우주 저 너머를 엿보던 미래는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그건 분명히 외계 행성이었단 말이야!”
며칠 밤낮을 새 가며 그것의 궤도와 속도, 그리고 외형을 분석한 미래의 결론은 그러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몇 주 내로 외계인이 행성째로 지구로 침입한다는 의견은 지극히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핀잔이 돌아올 뿐이었다.
천체물리학계의 떠오르는 유망주였던 유미래에 대한 평가는 그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자신을 아끼던 교수마저 미래를 동정하듯 바라보다 한마디 하고는 돌아섰다. 진지하게 주장하는 거라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그래서 유미래는, 정신과 레지던트 천태이를 찾았다.
“…자, 미래야.”
절대, 교수의 권유를 따른 건 아니었다. 아무도 자신의 발견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죽도록 억울했고, 외계인이 지구를 침범한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해져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해결해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한없이 무기력해지고는 했다. 일상생활을 거의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즉, 미래에게는 자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괜찮았다. 천태이가, 태이 오빠가 나를 믿어준다면…….
“…약 받아.”
천태이의 낯은 평온했다.
흰 가운 차림으로 마주 보고 앉아서 미래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는 품속에서 흰 약병을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언제나 똑같이 생긴, 조그만 흰색 통 속에 담긴 조그맣고 동그란 알약 14정. 표면에는 ‘#4’이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미래는 태이와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하고 있었고, 이번으로 벌써……, 몇 번째인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네 번째겠지.
“자기 전에 한 알. 알지?”
미래는 태이가 내민 약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약효는 확실했다. 미래는 태이의 말을 곧잘 듣는 편이었고, 그와 의사 대 환자로서 만났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밤 약 한 알을 삼키면 편하게 잠들 수 있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껏 자신이 끈질기게 주장해온 모든 것들이 전부 헛소리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빠.”
하지만 미래가 원한 처방은 이런 게 아니었다. 몇 달 동안 맹신해온 신념을 꺾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미래는 자신의 연구 과정을 상기하며 견뎌냈다. 모든 관찰 과정은 철두철미했으며, 자신의 주장은 수학과 과학에 근거해서 정확하게 계산해낸 결과물이었다. 미래의 판단이 엇나간 일은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래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람들의 매도가 끔찍이 무서웠지만, 그 이상으로 인류의 존속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를 인지하고도 무시한 채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미래가 태이에게 원한 건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네 말이 맞아’ 라고, 공감하고 격려해줬으면 했다.
천태이는 상냥한 주치의였다. 미래가 말을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절대 끊지 않고 끝까지 전부 들어주었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그런 식으로 얄팍한 위로도 곧잘 건넸다. 태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지 말라며 매도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의 의견에 동조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친절했다’. 지금도 그랬다.
“대꾸 좀 제대로 해줘…….”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는 미래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언제부턴가 미래는 무척 쓸쓸했다. 태이에게 상담을 받는 이 순간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미래는 이것이 진정한 고립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빠도 내 말이 그렇게 같잖게 들려?”
“그렇지 않아, 미래야.”
태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수선하게 맴도는 시선은 미래를 향했다가, 탁상 위의 흰 달력을 향했다가, 오후 네 시 반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향했다가, 다시 미래에게로 돌아왔다. 한 손은 여전히 약통을 쥔 채였다.
“나는 그냥……,”
말꼬리를 흐리는 태이의 얼굴은 무감했지만, 동시에 온갖 감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래는 그 얼굴에서 미약하게 묻어나는 감정 하나를 겨우 읽어낼 수 있었다. 곤란함, 이었다.
“…미래야.”
약통을 미래의 앞에 내려놓은 태이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즘에……, 너무 지쳐 있는 것처럼 보여.”
기분전환을 하자. 덧붙인 태이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이 제 양손을 겹쳐 쥐고는 잠시 침묵했다. 회오리치는 눈동자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미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제 앞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리 망상한 미래는 고립감을 홀로 삼켜냈다. 곧 태이의 입이 벌어졌다. 뜻밖의 문장이 흘러나왔다.
“…여행이라도 갈래?”
. . .
충전기, 세면도구, 여분의 옷과 속옷. 캠핑 용품이나 음식 같은 건 그곳 근처에서 사기로 했고……. 목록을 하나하나 확인한 미래는 포스트잇을 꾸깃꾸깃하게 접어서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넣고 침대에 누웠다.
태이는 그날, 미래에게 캠핑 여행을 제안했다. 분명 자신은, 사람과 대면하는 상황이 가장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시기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집을 떠나서,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인적 드문 곳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처방이 될 것이라는 게 천태이의 의견이었다.
미래는 수긍했다. 남과의 대화가 두려워진 지 오래였다. 친구들도, 지인들도, 심지어는 가족마저도 제 말에 공감해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이는 태이뿐이었다. 자신을 유일하게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자, 제 주치의이기도 했던 천태이와 단둘이 지낼 수 있다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태이는 미래의 상태를 최대한 배려해서 여행 계획을 짜 왔다. 오전 일곱 시에 미래가 집 앞에 서 있으면, 태이가 자가용을 가지고 와서 그를 태우고 목적지까지 운전을 하겠다고 했다.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표를 끊거나, 택시 운전사와 대화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될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오전 여섯 시 반으로 휴대전화 알람을 설정한 미래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 잊어버린 건 없었나……. 곱씹고 있자면 전화가 울렸다. 천태이였다.
“응, 오빠.”
— 「미래야, 짐은 다 쌌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래는 눈을 뜨고 몸을 조금 뒤척였다. 비스듬히 누운 시야에, 아까까지 신경 써서 준비해놓은 캐리어와 백팩이 단정하게 쌓여 있었다.
“…방금 막 마무리했어.”
— 「여권이랑 지갑은 잘 보이는 곳에다 둬.」
“네, 네.”
— 「그래, 걱정돼서 전화했어.」
“걱정 안 해도 이 정도는 다 하는걸…….”
어린애도 아니고. 푸념을 삼킨 미래는 작게 웃었다. 잔소리처럼 들려도, 실은 알고 있었다. 태이는 자신을 챙겨 주고 있었다. 정신과에서 일하면서 죽을 만큼 불안해하는 이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 왔을 것이다. 걱정이 될 만도 했다.
— 「약 먹었어?」
미래는 움찔, 하고 어깨를 떨었다. 아……, 맞다. 약은 매일 밤 자기 전에 한 알씩 복용하고 있었다. 오늘은 짐을 싸는 김에 방까지 오랜만에 청소를 했다. 평소보다 활동량이 많아서인지, 약을 먹지 않았음에도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려던 참이었다.
“이, 이제 먹을 거야!”
미래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을 살폈다. 목재 책꽂이 구석에서 혼자 이질적인 하얀색으로 덧칠해진 약통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미래는 그것을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 방을 청소하면서 눈에 잘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 둔 탓에,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절대 불문율과도 같이 매일 밤 목구멍 뒤로 넘기는 그 조그맣고 동그란 약 한 알을…….
…절대 불문율?
손바닥에 알약 하나가 굴러들어올 무렵, 미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서 그것을 응시했다. 절대 불문율이라니. 그저 화학 성분 몇 가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알약에 불과하다. …이게 뭐가 그렇게 특별하길래?
약의 성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미래는 약을 처음 처방받았던 날 태이가 덧붙였던 설명을 기억해냈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었기에 수면제를 처방한 것이다. 사람에게 잠은 음식물 섭취만큼이나 중요하며, 건강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정신건강에 큰 관여를 하고 있으니, 수면시간이 늘어나면 만성적인 불안감이나 망상증도 눈에 띄게 개선이 될 터.
…하지만 약은 얼마든지 바꿔치기를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에게 필요한 약은 이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약 따위는 필요 없었거나. 뇌리를 스친 생각은 빠르게 미래의 대뇌를 장악했다. 실은 오빠도 나를 믿고 있지 않은 거라면 어떡하지. 아니, 종종 고찰했듯 천태이는 유미래의 아픔을 이해해주었을 뿐, 그의 주장에 동의를 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한 약을 먹여서 나를 ‘남들이 보기에 정상인 것만 같은 상태’로 만들어버리려는 걸지도 몰라.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나에게 약을 먹이려고 할 이유가 없어. 의식의 흐름이 그쯤에서 마침표를 찍자, 미래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손바닥에 들어온 알약을 도로 집어넣고는, 약통 표면을 살펴보았다.
약통에는 원래 붙어 있었던 설명 라벨이 찢겨나가듯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라벨은 대부분 소실되어, 끄트머리에 남은 일부 글자만 알아볼 수 있었다. …환각, 환청, 과다복용 시 기억력 및 판단력 저하, ……. 읽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미래는 한쪽 귀에 휴대전화를 가져다 붙인 채로 침묵했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태이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행 가서도, 약 챙겨 먹는 거 절대 잊어버리지 마.」
태이의 단호한 목소리가 수화기 스피커를 통해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미래는 약통을 책꽂이 구석에 도로 돌려놓았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내려놓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애도 아니고, 당연하지.”
미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도 약통은 홀로 새하얀 빛깔을 띠고 있어서, 보고자 하면 눈에 아주 잘 띄었다.
책꽂이 구석에 놓인 약통, 그리고 굳게 닫힌 채 방문 앞에 놓인 캐리어와 백팩. 그것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으면 태이의 목소리가 작별을 고했다.
— 「내일 보자, 미래야.」
“응, 오빠.”
전화가 끊겼다. 마치, 처음부터 약 얘기를 꺼내려고 제게 전화를 걸었던 것만 같다고 미래는 생각했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내려놓은 미래는 눈을 감았다. 풀벌레 소리가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와 귀를 간지럽혔다. 야생의 소음은, 잠이 전신을 서서히 짓눌러갈수록 뒷걸음질 치듯 멀어지더니 이윽고 귓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오빠, 이거 유통기한 거의 다 됐잖아.”
미래는 장바구니 속에서 꺼낸 통조림 하나를 치켜들었다.
여섯 시 오십 분 정도에 태이는 차 한 대를 몰고 미래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진작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미래는 캐리어를 트렁크에 집어넣고, 백팩은 양팔로 안아 든 채로 조수석에 탑승했다.
천태이는 그럭저럭 느긋하게 운전하는 타입이었다. 도심에서 벗어나는 고속도로는 그날따라 유독 한적했고, 두 사람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철 지난 가요를 흥얼거리며 네 시간 정도를 내리 달렸다. 미리 싸 온 김밥과 빵을 먹어치우고 간식으로 꺼낸 건빵 봉지까지 다 비워 갈 무렵, 조수석 의자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미래를 태이가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곧 도착할 테니까, 미리 얘기했던 대로 산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까운 마트에서 캠핑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가자고…….
“…곧 먹을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 어느 낡고 후미진 동네의 마켓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자신이 방금 장바구니에 적당히 털어 넣은 참치 통조림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태이는 그리 대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반성하는 대답을 기대했건만……. 태이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자, 미래는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래도, 통조림이잖아! 유통기한이 몇 년은 되는 음식인데, 그게 거의 다 될 정도라는 건 만든 지 엄청 오래됐다는 거 아니야.”
찝찝하단 말이야. 궁시렁거린 미래는 통조림 판매대를 뒤적거렸다. 보통 이런 곳에서는 선입선출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앞쪽에 진열된 통조림을 구석으로 치워 버린 미래는 한 줄씩 통조림을 꺼내어 유통기한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것도, 그 다음 것도, 그 다음다음 것도…….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거기서 거기였다.
“…다 비슷비슷하네.”
“어쩔 수 없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물건을 담아나갔다. 텐트, 간이 의자, 가스버너……. 두 사람 다 캠핑을 자주 다니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새로 사야만 했다.
곧 장바구니는 혼자 들기 버거울 만큼 무거워졌지만, 미래는 태이가 마지막으로 저녁에 구워 먹을 고기를 고르는 동안 기우뚱거리며 계산대로 뛰어갔다. 여행길 운전은 전부 태이가 맡았고, 앞으로 텐트를 세팅하거나 고기를 굽는 일도 분명 태이의 손을 많이 거치게 될 것이다. 이 여행 자체가, 자신을 생각해서 태이가 모처럼 계획해준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럴 때라도 자신이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물건이 한가득 든 장바구니를 계산대 위에 조용히 올려놓은 미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종업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주세요.”
그러나 종업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요?”
애초에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를 부르든 말든, 종업원은 바코드 기기 앞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데에 열중할 뿐이었다. 미래는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 사람,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헐뜯거나 비난하는 반응에는 조금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업원은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이지도, 그렇다고 신이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무반응, 무표정, 무감정……. 왜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태이와 상담을 할 때 토해냈던 자신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일렁이며 메아리쳤다. 흔들흔들, 흔들흔들. 음파가 된 목소리가 울리자 온 사방의 풍경이 함께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래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계, 계산해달라니까요!”
“…미래야.”
다정하게 미래를 불러세우며 어깨에 손을 얹는 이가 있었다. 유미래의 말을 들어주는, 지금으로서는 이미 지구상에서 유일해져 버린 것만 같은 남자. 천태이가 미래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와 미래의 낯빛으로부터, 태이는 이곳에 깔린 짙은 단절감을 빠르게 파악했다. 그녀와 종업원 사이를 가로막듯 끼어들어 선 태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이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거 계산 좀 해주시겠어요?”
그제야 종업원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지금 막 계산을 부탁한 손님 ‘천태이’의 쪽이었다. 곁에 선 미래에게로 시선이 흘러드는 일은 없었다.
“아, 네.”
삑, 삑, 삑…….
종업원이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귀를 찔렀다. 봉투 드릴까요? 아, 네, 큰 거로 두 장 주세요. 카드로 결제하시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종업원과 태이 사이에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미래는 멍하니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꼬치꼬치 따져 묻자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태이라면 설명해줄 것도 같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주치의이자 소중한 사람인 그이의 언어로 직접 확인받는 것이 두려웠다.
“…가자.”
태이가 꽉 채운 커다란 봉투를 양손에 들자, 미래는 그를 위해 출입구를 힘껏 열어젖혀 주었다.
문이 열리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석간신문 몇 장이 흩날렸다. ‘운석 발 외계 생명체 성층권 돌파…’ ‘각국 정상, 지구안보위원회 긴급 결성…’ ‘지구멸망 음모론 급부상…’ 큼지막하게 인쇄된 글자 몇 개가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미래는 까마귀 떼처럼 흩날리는 신문지들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일제히 날아오른 종잇조각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태이가 차를 향해 걸어가는 와중에도 미래는 출입구 앞에 서서 신문지가 날아간 방향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그것들은 진짜였을까, 아니면 과대망상증 진단을 받은 정신과 환자인 내가 생각해낸 환상이었을까……. 가늠할 새도 없이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타. 그렇게 말하듯 태이는 미래를 향해 눈짓했다. 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과 완전히 단절되려면, 저 멀리 보이는 골짜기로 조금 더 파고들어야만 했다.
. . .
샛길로 빠져서 삼십여 분을 더 달리자, 새까만 아스팔트로 덮인 포장도로는 곧 울퉁불퉁한 흙빛 비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사락사락,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지나쳐서 덜커덩덜커덩, 첨벙, 탕탕탕. 돌멩이와 웅덩이를 짓누르며 질주하자 차체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미래는 위로 손을 뻗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불안한 듯이 전방을 주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차창 바깥으로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나무들을 응시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만큼 덜컹거리는 소음이 심해지자, 미래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태이의 얼굴은 무감했다. 피곤해 보인다고, 미래는 생각했다. 오래 운전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시선을 느낀 태이가 입을 열었다. 미래는 흠칫 놀라 다시 앞 유리로 눈을 돌렸다.
“…왜, 왜 이렇게 덜컹거리지.”
손잡이를 꼭 붙잡은 채로 더듬더듬 꺼낸 말은 초라하게 들릴 정도로 작았다. 덜컹덜컹, 태이는 곁눈질로 미래를 흘긋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불안해하는 게 웃긴가. 모난 생각을 하면서도, 미래는 태이의 미소에 조금 안도했다.
“비포장도로니까 차가 덜컹거리지, 미래야.”
“…아니, 오빠. 그건 나도 알지…….”
잠시나마 안도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태이의 속내를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불편한 탑승감이 이어지자 미래는 메스꺼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지를 에워싸고 서서히 조여 오는, 형용할 수 없이 불온한 감각이 그 자리에 있었다. …단순한 멀미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미래는 버튼을 눌러 측면 유리를 내렸다.
기계음 소리와 함께 유리가 천천히 내려가자 축축하고 꿉꿉한 숲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미래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갈증 난 짐승처럼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찾으려 애를 썼다. 날개를 부딪히며 잔잔하게 울어대는, 밤마다 제 귓가를 맴돌던 풀벌레 소리를…….
“너무 신경 쓰지 마.”
차체가 자아내는 불협화음 속에서 태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움찔, 어깨를 들썩인 미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미래를 달래는 그 목소리는, 진료실에서 자신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 주던 주치의로서의 천태이가 내뱉은 음성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들이마신 숨을 내쉬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메슥거리는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
그제야, 컴컴하던 시야에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스쳤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가진 잿녹빛의 침엽수들이 길을 따라 일렬로 자라나 있었다. 유미래는 눈을 깜박였다. 나무들의 단조로운 행렬은 지평선까지 쭉 뻗어서, 저만치 멀리에서는 다른 산과 거의 맞닿아 커다란 골짜기를 만들어냈다.
비탈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래는 깨달았다. 아, …도착했구나. 여기라면, 아무도 나에게 영향받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겠구나.
“…알았어.”
대꾸한 미래는 내밀었던 고개를 다시 조수석으로 꾸겨 넣었다. 도로 올라가는 차창 유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브레이크를 밟은 차가 관성을 따라 앞뒤로 부드럽게 들썩였다. 미래는 무릎 위에 올린 백팩을 껴안고 허리를 숙였다. 모처럼 떠난 여행인데 그다지 신이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도록 무언가에 쫓기며 달려나가다가, 결국엔 이런 곳까지 도달해버렸다는 느낌만이 들 뿐이었다.
“…많이 피곤해, 미래야?”
걱정스럽게 묻는 태이의 질문에도 미래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느릿느릿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기묘한 피로감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래?”
“아, 아……, …아니야.”
웅얼거리며 미래는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고, 특별히 몸 어딘가가 아프지도 않았다. 고작 혼자 조금 기분이 나쁘다는 핑계로 태이의 성의를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마냥 최악인 것도 아니었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인적 드문 산골짜기의 정경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무척 평온하게 보였다. 자신에게 야유를 던지는 사람도, 비논리적이라며 제 의견을 맹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자신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버리는 사람도 이곳에는 없었다.
“오히려 조금 낫네.”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중얼거린 미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태이를 바라보았다. 문명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이 적막한 공간에서, 제 곁에 남은 것은……. 천태이, 태이 오빠. 자신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주는 눈앞의 단 한 사람뿐이었다.
운전석에 비스듬히 앉아 미래와 눈을 맞추던 태이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찰그락, 쇠 부딪히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미래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이가 조수석으로 상체를 내밀어, 미래와 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올 때까지.
“미래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자신을 호명하자 미래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뺨에 새겨진 흉터와 그 위로 소용돌이치는 갈색 눈동자는, 마치 온갖 망상들로 헤집어져 흙탕물처럼 어지러워진 제 머릿속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는 사이에 태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음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무척 간결하면서도 무미건조하고, 또 동시에 냉담했다.
“약은 챙겼지?”
약?
유미래는 눈을 깜박였다.
아, …알약.
조그만 흰색 통 속에 담긴, 조그맣고 동그란 그거.
“…그, 그럼. 당연하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미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끝이다. 바보가 봐도 티가 날 만큼 정직한 거짓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 태이 오빠는 어떤 감정이 서린 눈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을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 듯한 당혹감, 주치의인 자신의 처방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했음을 눈치채버렸다는 점에서 오는 슬픔, 혹은……. 상상 속 선지는 뇌수를 타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미래에게는 답안지를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암전된 시야, 늘어지는 고요. …어쩌면 고작 삼 초 정도의 시간을 삼 분처럼 느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태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운 그 목소리는 언제나의 천태이였다.
“여기서 조금 자고 있어. 내가 이 앞에 텐트 치고 불 피워 둘게.”
인기척이 멀어지더니, 운전석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으응……. 조그맣게 웅얼거린 미래는 계속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렇게 있었다. 밖에서 펄럭이는 텐트 천을 펼치고, 맑은 탕 탕 소리와 함께 바닥에 못을 박고, 그르르륵, 쇠로 된 캠프파이어 그릴을 끌어당기는 소리. 치지직, 치직, 하고 불을 붙여 놓고 짐을 옮기는 소리……. 태이가 주변을 정리하면서 발생하는 온갖 소음이 차창 유리를 지나 한층 흐릿하게 들려오는 것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차츰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유미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미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각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제 몸을 뒤덮은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었다. 미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더듬거려 보았다. 보들보들하고, 제 온기가 배어들어 따끈따끈한 극세사의 질감……. 자신이 캐리어 속에 꾸겨 넣어 두었던 담요인 것 같았다.
그리고 체온 외에도, 제 뺨을 따스하게 만드는 미지근한 온기가 있었다. …나무 타는 냄새가 났다. 미래는 냄새가 나는 쪽을 다시 주의 깊게 응시했다. 서너 발짝쯤 떨어진 곳에 그릴이 있었다. 거의 다 꺼져 버린 숯불이 은은하고 미약한 붉은빛을 냈다. 그제야 미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주변과 다를 것 없이 어두컴컴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언뜻언뜻 반짝이는 별이 몇 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한밤중이 되도록 자 버린 모양이었다.
“미래야.”
불현듯 누군가가 제 손을 움켜쥐자, 미래는 힘없이 소리를 질렀다. 아악, 하고 뱉은 음성이 메아리치며 작아지다가 곧 잦아들었다. 광원이라고는 꺼져 가는 저 캠프파이어 불빛밖에 없었기에, 목소리 주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지금 이 시점에서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 동창이자 주치의이고, 그 이상으로 깊은 감정까지 품고 있는 데다가, 이 안락했어야만 했던 여행을 제안해주었던…….
…하지만 왜, 이런 한밤중의 산골짜기에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건데?
생각 하나가 끼어들었다. 자신도 이전—정신이 멀쩡했을 때—에 몇 번이고 이런 산속으로 여행을 떠나고는 했었다. 생태계는 본디 소란스러운 곳이다. 눈으로 뒤덮이는 엄동설한이 아닌 이상, 이 정도로 자연에 휩싸인 공간이라면 낮에는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귀뚜라미나 배짱이 같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야만 한다. 생명력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지금 이 정적은, 미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미 외계인이 온 지구를 점령해서, 무언가 몹시 나쁜 짓을 해 버리지 않은 이상은.
천태이를 떠올리며 고요해지려던 미래의 의식은, 바람에 흩날리는 촛불 불꽃처럼 다시 위태롭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오빠, 나……,”
미래는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나……, 너무 무서워…….”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쥐어 짜낸 미래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유일한 소음이 되는 이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무서웠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득한 고립감이 소름 끼쳤으며, 무엇보다도……, 제 곁에 앉아 자신의 손을 움켜쥔 이 존재가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목소리는 분명히 태이였다. 줄곧 같은 목소리였으므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곁에서 함께해 준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미래는 이제 자신의 감각을 신뢰할 수 없었다. 손은 자신이 아는 태이처럼 크고 가늘었지만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했다. 체향은 흙먼지 냄새에 묻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은……, 칠흑 같은 어둠에 집어 삼켜져서,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미래야.”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미래를 불렀다. 미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응시했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미래의 땀 쥔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딱딱하고, 미지근하고, 매끄럽고 둥근 감촉. 미래는 굳은 손을 겨우 움직여 그것을 손바닥 안에서 굴려 보았다. 원기둥 모양의 물건이었고, 한쪽 면에는 둥그런 뚜껑이 만져졌다. 미래는 한발 늦게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아, 이거……,
“약, 먹어야 해.”
그러면 전부 괜찮아질 거야.
익숙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받아들이자.
공포에 압도된 미래는 결국 그런 결론을 내어놓았다. 인정하자. 내가 틀렸다고 하자. 그렇게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결정을 합리화하는 문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래의 뇌수 속에서 솟구쳐 흘렀다. 그래야만 해. 지금은 그래야만, 내 주장이 틀려야만, 외계인 따위는 없고, 그저 내 정신이 이상한 거라고, 나에게 병이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라면…….
유미래는 약을 제 입속에 털어 넣고 삼켰다.
등 뒤에서, 풀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쿵.
“왜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책상 치는 소리가 진료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미래는 주먹 쥔 손을 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흰 벽, 흰 책상, 흰 의자, 흰 바닥으로 뒤덮인 진료실에는 새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주 메스껍고 역한 냄새였다.
미래는 당장이라도 점심에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미래에게는 설명해야 할 것이 잔뜩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까?”
외계인이 온다. 외계인이 지구로 찾아온다. 미지에서 온 것들이 곧 지구를 뒤덮을 것이다. 그것이 스물다섯 살 천체물리학도 유미래의 주장이었다.
“…자, 미래야.”
미래에게는 자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괜찮았다. 천태이가, 태이 오빠가 나를 믿어준다면…….
“…약 받아.”
천태이의 낯은 평온했다.
흰 가운 차림으로 마주 보고 앉아서 미래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는 품속에서 흰 약병을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언제나 똑같이 생긴, 조그만 흰색 통 속에 담긴 조그맣고 동그란 알약 14정. 표면에는 ‘#5’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미래는 태이와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하고 있었고, 이번으로 벌써……, 몇 번째인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다섯 번째겠지.
“자기 전에 한 알. 알지?”
미래는 태이가 내민 약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대꾸 좀 제대로 해주면 안되겠냐든가, 내 말이 같잖게 들리냐든가……. 쏟아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미래는 태이를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울먹였다.
“…또, 또 상담해줄 거지?”
“그럼, 미래야.”
태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즉답이었다.
“2주 뒤에 다시 찾아와 줘.”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 듯이 우물쭈물하던 미래는, 곧 약통을 움켜쥔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속한 거야. 그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는 진료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