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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성탄절을 그리며
2004자 / 1차 OC / 건조한 일상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자.”

방바닥에 엎드려 누운 세르게이가 중얼거렸다.



초겨울의 어느 주말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낮잠을 자던 세르게이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올가가 슈퍼마켓에서 보드카를 두어 병 사서 돌아온 참이었다. 같이 장 보러 가지 않았느냐고 웅얼거려도 올가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랬던가? …어차피 살 건 뻔하잖아.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세르게이의 곁에 털썩 앉았다. 비닐봉지에서 보드카 한 병을 꺼내고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았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눈이 펑펑 내릴 거라고 안내하는 뉴스 채널을 지나쳐서, 드라마 채널과 스포츠 채널을 단숨에 건너뛰어, 고전 영화 채널에 도달해서야 겨우 멈췄다. 올가로서는 이미 두어 번쯤 본 적 있는 영화였지만— 상관없었다. 흑백 스크린 속 배우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르게이가 보드카 뚜껑을 땄다.

“사서, 뭐 어쩌게.”
“당연히 방에 세워 둬야지. …분위기 정도는 내자고, 올랴.”

취기는 금방 찾아왔다. 첫 병의 바닥을 보기도 전부터 몸이 흐물흐물해져서 녹아내리는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누워서 나란히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서로를 바라보거나 했다. 영화 소리가 일렁이다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서로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게 맴도는 탓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말에 올가는 눈썹을 찌푸렸다. …딱히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듣는 단어였기에, 조금 낯설게 들렸을 뿐이었다.

“백화점에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걸 판대.”
“…돌아가는?”
“응, 빙글빙글……. 휴일 기분 내기 딱 좋지 않겠어? 조그만 걸 하나 사서 놔두자.”
“…….”
“그리고 여느 때처럼 술에 꼴아서 방바닥에 누워 버리면……, 그걸 멍하니 감상하다 잠들자.”

세르게이의 목소리는 평상시보다 느리고 발음이 어딘가 어눌했다. …꽤나 취했다. 올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취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내일 아침이 되면 이런 대화는 전부 잊어버릴 것이다. 실없는 잡담 같은 문장들이었다.
한결 낯이 풀어진 올가는 돌아가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이 사는 단칸방은 좁아서 무언가 더 놔둘 공간이 별로 없었다. 굳이 놓는다면……, 텔레비전 옆, 지금은 옷걸이가 놓인 저 자리를 조금 치워야 할 것이다.
올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몸에 알코올이 돌아서인지, 상상 속 시야는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흔들렸다. 채도 낮은 녹빛을 띠는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볼 모양 장식들. 그 붉게 반짝이는 장식들이 눈앞에서 돌고, 돌고, 돌고, 돌고…….
적색으로 점멸하는 머릿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올가는 문득 몇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유년기 언젠가의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은 붉은 양말부터, 무언가를 다그칠 적마다 핏발이 서던 아버지의 눈, 쓰러진 어머니의 곁에 흥건했던 새빨간 피, 그리고…….
…방황하던 시야의 끝에는, 마주 보고 누운 세르게이가 있었다.
그는 보드카 병을 꼭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병에 인쇄된 상표명이 눈에 띄게 붉었다. 크리스마스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듯했다.

“…생각해볼게.”

올가는 벌떡 일어나며 대꾸했다. 그 기척에 눈을 번쩍 뜬 세르게이는 올가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술김에도 맥락은 얼추 파악한 듯했다.
‘예센’의 눈에 비친 ‘올랴’는 건조한 여자였다. 어려서부터 실없는 소리에는 좀처럼 맞장구를 쳐 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웬일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도 올가의 낯은 담담했다. 덧붙이는 말은 더 없었다. 대신 올가는 비틀비틀 걸어서 소파를 반 바퀴 정도 돌았다. 아무렇게나 적당히 내팽개쳐 둔 비닐봉지가 거기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올가는 곧 보드카 한 병을 더 꺼냈다. 난방이 거의 안 되는 방에 적당히 놓아둔 보드카는 여전히 차가웠다.
뚜껑에 손을 대기 전에, 올가는 무심코 상표명에 눈길을 줬다. 낯선 붉은색으로 각인된 그 촌스러운 필기체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아주 작게 웃음이 샜다. 올가는 곧 웃음기를 지우고 뚜껑을 땄다.

“지금은 이 빌어먹을 유리병이나 더 비우자고…….”